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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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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는 1957년 9월 15일에 실시되었으며,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과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 연합이 50.2%의 득표율로 연방의회 단독 과반수를 확보한 선거이다. 이는 전후 독일 역사상 유일한 사례로,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31.8%를 득표했다. 선거 결과 기민/기사 연합의 압승으로 아데나워 총리의 리더십이 강화되었고, 사민당의 지지율 상승과 자유민주당(FDP)을 포함한 3당 체제가 확립되었다.

2. 배경

(내용 없음)

2. 1. 정치적 상황

콘라트 아데나워 연방 총리는 사회민주당(SPD)의 경쟁자인 에리히 올렌하우어에 비해 몇 가지 확실한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서독은 1955년에 완전한 주권을 확보했고, 1957년 봄에 통과되어 같은 해 1월 1일부터 소급 적용된 연금 개혁법은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1953년부터 연평균 7%의 경제 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젊고 숙련된 고학력 노동자들이 동독에서 이주하여 생산성을 높게 유지하고 임금 상승률을 낮춘 데 기인했다.[2] 서독은 1957년 3월에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했다. 서독 경제는 매우 낮은 실업률을 보이면서 꾸준히 성장했고, 대부분의 서독 국민들은 1949년이나 1953년보다 더 풍요롭고 안전하다고 느꼈다.[3][4]

2. 2. 핵무장 논쟁

아데나워 총리는 처음에 독일 연방군의 무장을 재래식 무기로 제한하겠다고 밝혔으나, 1957년 4월 5일 입장을 바꾸어 "전술 핵무기는 포병의 추가 개발에 불과하다... 우리 군대가 이를 갖추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러한 신형 무기를 따라야 한다. 결국, 이것들은 사실상 일반적인 무기이다."라고 말하며 핵무장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에 대해 4월 12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 소속의 저명한 물리학자 18명은 서독이 핵무기를 생산, 시험,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괴팅겐 선언을 발표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아데나워 총리는 처음에는 이 문제를 외면하려 했으나, 언론의 비판이 거세지자 본에서 5명의 물리학자 대표들과 직접 만났다. 7시간에 걸친 회동 끝에 발표된 공동 성명에서는 "독일 연방 공화국은 자체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연방 정부는 독일 핵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 참여에 관해 접근할 이유가 없다"고 명시하여 논란을 진정시키려 했다.

이 핵무장 논쟁은 4월 소련의 공격적인 성명 발표로 더욱 고조되었으나, 5월에 열린 NATO 봄 회의를 계기로 점차 마무리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논쟁은 선거 국면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예상외로 건강한 모습을 보인 아데나워의 선거 전망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3. 선거 제도

195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는 비례대표제의 일종인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용 제도를 채택했다. 소선거구는 총 247석이었다.

유권자는 두 개의 표를 행사했다. 제1투표는 지역구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것이고, 제2투표는 주 단위로 작성된 정당 명부에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제1투표에서는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자가 해당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전체 의석 배분은 기본적으로 제2투표에서 각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따라 결정되었다. 하지만 소수 정당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한 조건이 있었다. 다음 두 가지 기준 중 하나를 충족하는 정당에게만 비례대표 의석이 배분되었다.


  • 제2투표에서 전국 유효 투표 총수의 5% 이상을 획득한 정당
  • 제1투표(지역구 선거)에서 최소 3명의 당선자를 배출한 정당 (이 조건은 이전 선거의 1석 기준에서 3석으로 강화되었다.)


또한, 특정 정당이 지역구 선거(제1투표)를 통해 얻은 의석 수가 정당 득표율(제2투표)에 따라 배분받아야 할 의석 수를 초과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 경우 해당 정당은 지역구 당선 의석을 모두 유지하게 되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의석을 초과 의석이라고 한다.

4. 주요 정당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기독교사회연합(CSU) 연합은 이 선거에서 과반수를 확보하였으며, 기존 연정 파트너였던 자유민주당(FDP), 추방자·권리박탈자 블록(GB-BHE), 독일당(DP)과 함께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서독의 집권 여당 지위를 유지했다. 주요 경쟁 정당으로는 에리히 올렌하우어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있었다.

4. 1.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CDU)

콘라트 아데나워 연방 총리가 이끄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과 기독교사회연합(CSU) 연합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경쟁자인 에리히 올렌하우어에 비해 여러 유리한 입장에서 선거를 맞이했다.

서독은 1955년에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으며, 1957년 초에 시행된 연금 개혁법(1957년 1월 1일 소급 적용)은 국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1953년부터 연평균 7%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동독에서 젊고 숙련된 고학력 노동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생산성을 높이고 임금 상승률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바가 컸다.[2] 서독은 1957년 3월 유럽 경제 공동체(EEC)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며 국제적 위상도 높였다.

이러한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매우 낮은 실업률 덕분에, 대다수 서독 국민들은 1949년이나 1953년 선거 때보다 생활이 더 풍요롭고 안정되었다고 느꼈다.[3][4] 이는 아데나워 총리와 CDU/CSU 연립 정부에 대한 강력한 지지 기반으로 작용했다.

4. 2. 독일 사회민주당 (SPD)

사회민주당(SPD)은 에리히 올렌하우어를 중심으로 선거에 임했으나, 당시 콘라트 아데나워 연방 총리가 이끄는 기민련/기사련 연합은 여러 측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2][3][4]

4. 3.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CSU)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연합(CDU)과 함께 자유민주당(FDP), 추방자·권리박탈자 블록(GB-BHE), 독일당(DP) 등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여당의 일원이 되었다.

4. 4. 자유민주당 (FDP)

자유민주당(FDP)은 이 선거 결과에 따라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연합(CDU), 기독교사회연합(CSU), 추방자·권리박탈자 블록(GB-BHE), 독일당(DP)과 함께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다.

4. 5. 전독일 블록/추방자 및 권리 박탈자 연맹 (GB/BHE)

전독일 블록/추방자 및 권리 박탈자 연맹 (Gesamtdeutscher Block/Bund der Heimatvertriebenen und Entrechteten|게잠트도이처 블록/분트 데어 하이마트페어트리베넨 운트 엔트레히테텐de; GB/BHE)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추방된 독일인들의 권익 보호를 주요 강령으로 내세운 정당이다. 일부에서는 극우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정당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1957년 선거 결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연합(CDU)/기독교사회연합(CSU) 주도의 연립 정부에 참여하였다.

4. 6. 독일당 (DP)

독일당 (DP)은 1957년 연방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연립 정부 구성에 참여하였다. 당시 여당 연정은 기독교민주연합 (CDU)과 기독교사회연합 (CSU), 자유민주당 (FDP), 추방자·권리박탈자 블록 (GB-BHE), 그리고 독일당 (DP)으로 이루어졌다.

5. 선거 운동

각 정당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포스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의 정책과 구호를 알리며 지지를 호소했다. 다음은 당시 사용된 주요 정당들의 선거 포스터이다.

6. 선거 결과

1957년 9월 15일에 실시된 서독의 제3차 연방의회 선거는 자르 보호령이 자르주로서 서독에 복귀한 후 처음 치러진 선거였다. 이에 따라 연방의회 정수는 이전 선거보다 10석 증가한 494석으로 조정되었다. 선거 제도는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를 채택했으며, 전체 의석은 제2투표(정당 명부 투표) 득표율에 따라 배분되었다. 다만, 소수 정당 난립을 막기 위해 제2투표에서 5% 이상 득표하거나 제1투표(지역구 후보 투표)에서 3석 이상 확보한 정당에게만 의석이 배분되었다. 지역구 의석이 비례 배분 의석보다 많을 경우 초과 의석이 인정되었다.

총 유권자 35,400,923명 중 31,072,894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87.8%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유효 투표 수는 제2투표 기준으로 29,905,428표였다.

선거 결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과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 연합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CDU/CSU 연합은 정당 투표에서 50.2%를 득표하여, 전후 독일 역사상 유일하게 단독으로 연방의회 과반수 의석(270석, 초과 의석 3석 포함)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5] 이는 자유 선거에서 단일 정당 세력이 과반수 정부를 구성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31.8%를 득표하며 181석(서베를린 의석 포함)을 확보하여 제1야당 지위를 유지했다. 자유민주당(FDP)은 7.7% 득표로 43석을 얻었으나 이전 선거보다는 의석이 감소했다. 독일당(DP)은 3.4% 득표에 그쳤지만 CDU와의 선거 협력 덕분에 17석을 확보하며 원내 정당 지위를 유지했다. 반면, 전독일블록/권리퇴출자연대(GB/BHE)는 5% 봉쇄 조항을 넘지 못하고 모든 의석을 잃었다.

1957년 연방의회 선거 정당별 의석수와 득표수 및 득표율
195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 결과
정당후보자 투표정당 투표의석수서베를린 선출 의석수
득표수득표수전체 의석(선거구)1957-1961
bgcolor="#000000"|기독교민주·사회연합
(CDU/CSU)
기독교민주연합
(CDU)
11,975,40039.711,875,33939.712151477
bgcolor="#008AC5"|기독교사회연합
(CSU)
3,186,15010.63,133,06010.485547
bgcolor="#EB001F"|독일 사회민주당
(SPD)
9,651,66932.09,495,57131.751694612
bgcolor="#FFED00"|자유민주당
(FDP)
2,276,2347.52,307,1357.714112
bgcolor="#8B4513"|전독일블록/고향 추방자·권리 박탈자 블록
(GB/BHE)
1,324,6364.41,374,0664.5900
bgcolor="#98F5FF"|독일당
(DP)
1,062,2933.51,007,2823.37176
bgcolor="blue"|독일 제국당
(DRP)
290,6221.0308,5641.0300
bgcolor="#0000CD"|연방 동맹
(FU)
295,5331.0254,3220.8500
bgcolor=|독일인 연합당
(BdD)
37,3290.158,7250.2000
bgcolor=|독일 중소기업당 동맹
(Mittelstand)
3,0240.036,5920.1200
bgcolor="#003C8F"|남슐레스비히 유권자연합
(SSW)
33,4630.132,2620.1100
bgcolor=|독일 공동체
(DG)
16,4100.117,4900.0600
bgcolor=|애국 동맹
(VU)
2,2500.05,0200.0200
bgcolor=|선량한 독일인당
(PdgD)
3560.0--00
bgcolor=|유권자 단체·무소속8450.0--00
bgcolor="#FFED00"|자유 인민당
(FVP)
----001
합계30,156,214100.029,905,428100.0049724722



CDU/CSU의 단독 과반 확보로 인해 기존 연립 파트너였던 FDP와 GB/BHE는 연정에서 이탈했다. 이후 CDU/CSU와 DP만으로 구성된 제3차 아데나워 내각이 출범했다.

이번 선거는 1953년 선거 이후 심화된 CDU/CSU와 SPD 양대 정당으로의 지지 집중 현상을 더욱 공고히 했다. CDU/CSU, SPD, FDP 외에 의석을 확보한 정당은 DP뿐이었으나, 이마저도 CDU와의 선거 협력에 힘입은 결과였다. 사실상 이 선거를 통해 CDU/CSU와 SPD의 양대 정당 구도에 중도 정당인 FDP가 가세하는 '3당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러한 구도는 1983년 선거에서 녹색당이 5% 저지 조항을 넘어서며 원내에 진입할 때까지 약 20여 년간 지속되었다.

또한, 이 선거는 독일당과 독일 제국당(DRP) 같은 우익 정당이 의석을 얻거나 유의미한 득표를 한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 이후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201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원내에 진입하기 전까지 우익 포퓰리즘 성향의 정당은 연방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더불어 CDU/CSU 또는 SPD 외의 정당이 지역구 의석을 얻은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 (1990년 선거 제외).

7. 선거 이후

선거 결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기민련/기사련 연합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서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독 과반 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7. 1. 정치적 영향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끈 기민련/기사련 연합은 이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기민/기사련은 연방의회 과반수를 단독으로 확보했는데, 이는 서독 역사상 자유 선거를 통해 단일 정당(연합)이 과반수 정부를 구성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이러한 결과는 아데나워 총리의 정치적 리더십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민주당(SPD) 역시 이전 선거보다 지지율을 높이며 의석수를 늘렸으나, 기민/기사련의 압승으로 인해 양당 중심의 정치 구도가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선거는 기민/기사련, 사회민주당과 더불어 자유민주당(FDP)이 주요 정당으로 자리 잡는 이른바 '3당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구도는 1983년 녹색당이 연방의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이전 선거에서 의석을 확보했던 전독일 블록은 이번 선거에서 모든 의석을 잃었다. 반면, 이념적으로 유사한 성향을 가졌던 독일당은 일부 의석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957년 선거는 우익 포퓰리스트 성향의 정당이 연방의회 의석을 차지한 마지막 선거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후 독일을 위한 대안(AfD)2017년 연방의회에 진입하기 전까지 약 60년 동안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은 연방의회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또한, 이 선거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첫 선거 이전까지 기민/기사련이나 사회민주당 소속이 아닌 다른 정당 후보가 지역구에서 직접 당선된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

참조

[1] 학술지 The German Party System and the 1961 Federal Election https://www.cambridg[...] 1962
[2] 서적 Adenauer: The Father of the New Germany 2000
[3] 서적 Grimberg's History of the Nations WSOY 1985
[4] 서적 A History of West Germany Basil Blackwell 1989
[5] 서적 ドイツの政党システム おうふ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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